스포츠 전문기자, 이영미 님

“내 세계를 넓히는 방법, 치열함과 진심”

1월 12일 콘조이스 연사 – 이영미 님

이영미 님

헤이조이스 인스파이러이자 스포츠 전문기자.

90년대 스포츠 여기자가 흔치 않던 시절, <일요신문>에서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를 취재하던 중 시카고 컵스를 전담하는 80세 칼럼니스트를 보며 영감을 받아 은퇴할 때까지 현장을 취재하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이 꿈을 좇아 부장 승진을 앞두고 퇴사 후 지금은 네이버 스포츠에서 인터뷰 전문 기자로 자리를 잡고 명성을 쌓는 중이다.

 


[선배의 가벼운 제안이 바꾼 인생]

스포츠를 엄청 좋아해서 처음부터 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에요. 대학교 졸업 후 홍보기획사에서 일을 했어요. 우연히 <일요신문>에 다니던 선배를 만났는데 그 선배가 ‘스포츠라이터’로 기고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시더라고요. 회사를 다니면서 <일요신문> 일을 병행했어요. 쉽게 표현하면 ‘아르바이트’였는데 그 일이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스포츠 현장, 선수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지는 기운이 절 살아 움직이게 하는 듯했어요. 미친 듯이 일했던 것 같아요. 회사 일과 일요신문 취재를요.

덕분에 일요신문이 제 능력을 높이 평가해줬고 입사 제안까지 이어졌죠. 하지만 그때 제가 쌍둥이를 임신하고 있어서 바로 이직하지는 않았어요. 아이를 낳고 계속 일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특히 기자로 일한다는 게 힘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도 일요신문 일은 놓지 않고 꾸준히 했어요. 박세리 선수, 홍명보 선수와 관련된 특종도 터트렸었고요. 일요신문 입사는 출산 다음 해인 2001년이었습니다. 다음 해에 월드컵이 있었잖아요? 히딩크 감독 쫓아다니면서 단독 기사도 많이 만들고 특종도 많이 썼었죠.

인생을 살면서 숱한 선택의 시간을 만나게 되는데 쌍둥이 출산 후 제가 일요신문 입사를 망설이고 계속 기획사에 있거나 다른 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같은 일을 해도 남다르게]

일요신문에서 스포츠 전문 기자로 일을 하면서는 같은 기사를 써도 남다르게 쓰기 위해 노력했어요. 정보를 찾기 위해 우편함, 휴지통도 뒤지고 뒷조사도 거침없이 했었죠. 그때 저는 젊었고 욕심도 많았으니까요. 예를 들면 박세리 선수가 1998년 US오픈 우승 후 귀국했을 때 단독 인터뷰가 불가능했지만 아버지를 통해 대전 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랑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수십 번의 전화로 간청을 드린 끝에 대전으로 내려오라는 허락을 받았었죠. 그 인연이 아주 오래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박지성, 이승엽 선수 등 의외로 아버님들과 인연이 많네요.

‘취중토크’라는 코너를 만들어서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어요. 스포츠 선수 인터뷰도 뭔가 달라야 하니까 ‘술’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온 거죠. 그전부터 술을 잘 마셨던 건 아니에요. 심지어는 사회생활하면서 술이 안 맞아서 힘들다고 느꼈는걸요. 그런데 취중토크를 하려면 취재원이 앞에 있는데 취하면 절대 안 되잖아요. 이때 ‘버티는 힘’을 키웠어요.

[‘특종’보다는 ‘신의’를 추구하다]

특종이라면 선수들의 여자친구, 가족까지 파고들었던 제가 바뀌게 된 계기가 있어요. 김응용 감독님과의 일화인데, 감독님이 삼성 라이온즈를 떠나기 직전 이런저런 소문이 돌 때였어요. 인터뷰 요청 전화를 드렸는데 감독님이 “지금 상황이 좀 그래. 내가 감독을 그만 둘 수도 있거든”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감독 용퇴 후 구단 사장으로 승진). 감독님이 직접 이런 말을 먼저 하셨으니까 저는 특종이라고 생각하고 김응용 감독님 아내분께 확인 전화를 드렸죠. 바로 수긍하시더라고요. 여기까지 했으니 기사를 바로 써도 되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일요신문에 기사가 나간 후에 난리가 났죠. 사실은 구단에서 먼저 발표해야 맞는 거거든요. 심지어 첫 기사가 난 곳이 일간지도 아니고 주간지니까 더 파장이 컸던 것 같아요. 이후에 감독님이 기자회견하던 날 저를 따로 불러서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 “이영미 기자를 믿었는데 그럴 줄 몰랐다”면서요.

사실 기자는 냉정해야 돼요. 특종을 만들어내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저는 김응용 감독님 보도 이후 사적인 자리에서 나온 얘기들은 기사로 쓰지 않고, 인터뷰로 써야 될 때는 “여기서부터 인터뷰다”라고 미리 말을 해줬어요. 나중에는 그런 노력들이 인터뷰이와의 사이에 신뢰를 형성해주더라고요.

전 일간지 출신이 아니다 보니 야구 전문, 축구 전문 등 전문 기자로 활약하지를 못했어요. 모든 종목을 취재하지만 야구 전문 기자, 축구 전문 기자라고 당당히 타이틀을 내걸 수 있을 만큼 전문적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잘하는 걸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나온 게 ‘인터뷰 전문 기자’였습니다. 전문 기자들처럼 경기 분석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기자는 아니지만 선수들 이야기, 스포츠인들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써 내려갈 자신은 있었으니까요. 그 선택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솔직하게 그러나 철저하게 준비하기, ‘프로’의 자세]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같은 기사도 좀 다르게 써야 된다’라는 게 인터뷰에도 똑같이 적용돼요. 유명한 선수들은 얼마나 많은 인터뷰를 하겠어요. 거기서 어떻게 다른 이야기를 뽑아내느냐가 인터뷰어로서 경쟁력이 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게 쉽진 않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인터뷰가 아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형성해주면 보다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잘 하는 게 ‘잘 들어주기’입니다. 필요할 때는 종종 저의 사적인 이야기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해요. 어떤 인터뷰이는 ‘도대체 이영미 기자가 어떻게 인터뷰를 진행하기에 선수들이 많은 얘기들을 다 털어놓는지 궁금했다’는 말도 하더라고요. 저는 잘 몰랐는데 제가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에 잘 맞나 봐요.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철저히 준비해서 영역을 넓혀가는 편이에요. 예컨대 미국 메이저리그 취재를 시작했을 때도 그랬어요. 처음에는 추신수 선수가 클리블랜드 마이너리그인 트리플 A 팀에 있을 때 현장 취재를 갔었어요. 추신수 선수 말로는 한국에서 자신을 찾아온 기자가 제가 처음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인연이 돼 이후 ‘추신수의 MLB 일기’ 연재로 이어졌습니다. 추신수 선수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일기를 10년이나 진행했고, 덕분에 메이저리그 현장을 더 자주 찾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류현진 선수와는 한화 이글스에 있을 때보다 LA 다저스 입단 후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류현진의 MLB 일기’를 연재하면서 말수 적고 속 깊은 선수의 고달픈 야구 인생도 엿볼 수 있었고요.

메이저리그 취재를 하며 많은 선수들, 감독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브루스 보치 감독님이에요. 메이저리그에서 ‘명장’으로 꼽히는 감독님인데,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그분과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어요. 여러 질문들 중 그분이 정말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해주셨던 부분이 기억에 남아요. 감독이란 자리의 어려움, 외로움, 희로애락에 대해 묻는 내용이었는데 보치 감독은 그런 질문이 아주 마음에 드셨나 봐요. 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샌프란시스코 전담 기자들한테 “왜 당신들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느냐, 승패와 숫자만 묻지 말고 내 인생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라고 웃으며 말씀하셨거든요. 완전 감동이었습니다.

[콤플렉스와 핸디캡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다]

여성이라는 점, ‘일요신문’이라는 주간지 매체의 한계, 그리고 여러 취재 분야 중 ‘스포츠’ 기자인 점 등은 관점에 따라 콤플렉스나 핸디캡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미리 한계를 규정하지 않았어요. 일을 할 때 ‘나는 여기자니까’라고 선 긋지 않았고, 헤어지자마자 택시 안에서 쓰러질지언정 술도 항상 끝까지 마셨죠. 일요신문에서 처음 일할 때는 스포츠 경기 프레스 카드(취재 출입증)도 잘 안 나오는 신문사였어요. 그런데 이게 오히려 자극이 되더라고요. 안 된다고 하면 좌절하고 그만두는 게 아니라 “그래? 그럼 나는 다른 방식을 시도해볼래”라는 식으로 돌파구를 찾았죠. 스포츠 기자라는 점도 오히려 도전해 볼 게 많다고 여겼어요. 야구, 농구, 골프, 축구 등 영역을 넓혀가면서, 중요한 인물들을 꼭 만나려 노력했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웃음). 그게 기자 정신이자 생존 본능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살아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이영미니까’ 믿고 인터뷰해주신다는 분들도 생겼고, 일요신문의 이영미가 아니라 이영미의 일요신문이라는 말도 들었죠. 이런 노력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출입증도 잘 나오고요. 여자 기자라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해서 스포츠 선수나 감독들의 측근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었어요. 특히 스포츠 선수들의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셔서 아예 아버지들 인터뷰 특집도 했었죠.

[현장에서 은퇴하는 것이 꿈이자 목표]

저는 현장에서 은퇴하는 것이 꿈인데, 그런 목표를 세우게 된 건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 취재 때 본 80세 기자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취재를 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수첩을 들고 나와 손을 떨면서 메모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가까이 가서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하셨는지 여쭤봤더니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일한 건 확실하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어떻게 이렇게 오래 일하고 계신지 궁금했는데 “그저 사회가 나를 계속 찾아주니까 그런 거다. 나에게는 죽는 순간이 나의 은퇴 시점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요. 그때 ‘저 할아버지처럼 계속 현장에 있고 싶다, 은퇴를 하더라도 현장에서 은퇴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일이나 가정을 선택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용기]

벌써 이렇게 성장했다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작년에 아이들이 수험생이었어요. 사실 너무 아이가 안 생겨서 인공수정도 하고 시험관 시술도 했었어요. 시험관 시술 두 번 만에 아이가 생겨서 ‘귀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쌍둥이라는 거예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슴 벅찬 기쁨과 함께 걱정이 들더라고요. ‘과연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쌍둥이들을 키우면서?’하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다행히 시부모님이 육아를 도와주신다고 해서 시댁에 들어가서 살았지만, 그래도 육아가 쉽지는 않았어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장에서 은퇴하겠다’라는 꿈을 꾸고 지금도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데는 가족들의 도움이 굉장히 컸어요. 가족들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을 거예요. 특히 남편이 제 커리어를 많이 지지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할 때도 진심으로 뿌듯해해요. 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친구네 아빠한테 “우리 엄마 스포츠 기자에요!”라고 했더니 “설마 이영미 기자는 아니겠지?”라고 해서 되게 기분 좋았다고 한 적도 있어요.

저는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인 거죠. 시댁, 남편, 5년 정도 애들을 봐주었던 베이비시터, 딸들 모두 저를 도와줬으니까요. 그러나 모두가 저와 같은 상황은 아니잖아요. 때로는 피치 못한 위기가 오기도 하고요. 저는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용기 있게 가족을 선택하는 분들도 존경스럽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이루어 온 커리어를 잠깐 내려놓는 것이 쉽지 않은 선택이거든요.

헤이조이스는 일하는 여성들이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확장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커뮤니티잖아요. 이런 커뮤니티가 있다는 게 많은 여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좀 더 일찍 생겼다면 저도 아이들 키우면서 일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을 텐데(웃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 각자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는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엄청 도움이 되잖아요. 존재만으로 감사하고 든든하죠.

 


 

<헤이조이스 프리미엄 컨퍼런스 Con.Joyce>

1월 12일 토요일,

이영미 님과 함께 ‘내 세계를 넓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Con.Joyce] 내 세계를 넓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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