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이자 이웃 치유자, 정혜신 님

“자꾸 그만둬도 괜찮아요”

10월 13일 콘조이스 연사 – 정혜신 님

정혜신 님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2008년부터 고문 피해자를 돕기 위해 만든 재단 ‘진실의 힘’에서 피해자 치유를 위한 집단 상담을 이끌었다.  2011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집단상담을 시작하며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에 또다시 치유공간 ‘이웃’을 열고 그곳에 머물며 아픈 마음들을 만났다. 2016년부터는 서울시와 함께 일반 시민, 리더 등을 치유활동가로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진료실에 머무는 의사가 아닌, 거리의 의사가 꿈이다.
– 지은 책으로 『당신이 옳다: 정혜신의 적정심리학』(2018)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2018) 『정혜신의 사람 공부』(2016)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2015, 공저) 『당신으로 충분하다』(2013) 『홀가분』(2011, 공저) 등이 있다.

 


 

Q. 그동안의 커리어를 보면 의사뿐 아니라 작가, 강연자, 치유자, 경영자 등 매우 다양한 역할을 해오셨는데요.  

그중 뭔가 치밀하게 계획하거나 의도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늘 우연이나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래도 돌이켜 보면 제 마음을 끄는 것의 핵심에는 ‘사람에 대한 강력한 집중’이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의 삶에 공감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지요.

 

– 국가 폭력 피해나 사회적 재난 현장에서의 활동도 우연히 시작하게 된 건가요?

네, 15년 전 전두환 정권의 간첩단 사건 조작으로 무고한 피해를 입은 박동운이란 분을 만나게 된 거지요. 온 가족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특히 장남인 박동운 님은 주범으로 몰려 18년 동안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했어요. 당시 출소한지 얼마 안 된 그분을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부탁으로 만났어요.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분이 좋아지고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감동과 충격을 받게 됐지요.

동훈 님에 이어 그분 가족이며 비슷한 경험을 한 분들을 여럿 뵙게 됐고… 경험이 쌓이면서 국가 폭력 피해자분들이 저를 속속 찾아오시면서, 생업보다 그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됐죠. 그렇다 보니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모습들이, 제 눈에는 치유가 필요한 상황으로 다가왔어요. 치유를 통해 사람들이 구해질 수 있겠구나.  그래서 아무도 도와달란 적 없고 그들 스스로조차 치유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없었음에도 그곳을 찾게 된 거지요.

 

[헤이조이스, 틀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들을 위한 곳]

 

Q. 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가는 대로, 끌리는 대로 살지 못할까요?

‘사는 건 이런 것이다’, ‘30대까지는 뭘 어떻게 해야 한다’, ‘여자란, 신입사원이란, 학생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인생의 규격이랄까 틀 같은 걸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틀 밖으로 나오려는 것들을 어떻게든 쳐내거나 다시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하죠.

사람들이 그 틀에 얽매이는 건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틀 안에서 무리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게 느껴지거든요. 틀을 벗어나게 되면 오로지 자기 힘으로 그 불안을 견뎌야 하죠. 그게 진짜 쉽지 않아요. 결국 다시 안으로 들어가게 되죠. 난 뭘 하며 사는 건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른 채, 참 열심히 사는데도 행복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면서.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틀 밖의 불안을 감수해야 해요. 그걸 피하려다 보니 삶이 고달파지는 거지요.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틀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은 나 하나가 아니거든요. 이들을 덜 불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헤이조이스와 같은 커뮤니티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불안한 사람 셋이 함께 있으면 덜 불안해져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고, 서로 지지하고 격려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부부는 애들이 어떤 회사를 6개월쯤 다니면 농담으로라도 “너 거기 아직도 다니냐?” 하고 물어봐요. 아이가 관성에 매여 그러는 걸까 봐요.

 

Q. 계속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다 보면 너무 자주 그만두게 되지 않을까요?

‘꾸준히 해봐야 한다’, ‘젊었을 때 한 번 끝까지 가봐야 한다’라는 식의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 너무 많아요. 그 때문에 압사당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사회에서, 제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많이 그만둬봐야 한다’라는 거예요.

계속 그만두다 보면 계속 적응 못하고 또 후딱후딱 그만둘 것 같죠?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평생 이러다가 내 인생 종 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남들보다 100배는 더 많이 하게 되고, ‘내 인내심이 부족한 것 아닐까’, ‘난 이런저런 면이 모자란 것 같아’ 끊임없이 자기 점검을 하는 것이 사람이지요. 그만두다 보면 습관이 돼 또 그만두는,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닌걸요.

오히려 사람은 뭔가를 그만둬보면서 스스로를 굉장히 생생하게 느끼게 돼요. 자기를 광야에서 날 것 그대로 느껴보는 경험, 그걸 또 견뎌보는 경험. 그 안에서 진짜 나다움, 나에 대한 감각을 찾게 되는 거예요. 그 시간을, 그 불안을 견디는 것. 그거 재능이고 실력이에요. 많이 그만둬 보고 많이 바꿔보세요. 그리고 옆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지지해주시고요.

 

– 옆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지지해주라는 말씀이 와닿네요.

그만두려고 할 땐 다 이유가 있는 거거든요. 남들이 다 가고 싶어 하는 공기업에서 승승장구하는 40대 초반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두고 싶다 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어쩌려 그래, 네가 또 그런 곳을 찾을 수 있겠어?’ 한대요. 심지어 어머니는 앓아누우셨고요. 결국 계속 출근을 하는데 순간순간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거예요. 하루에 4시간도 못 잘만큼 일이 많고 힘들고요.

그이가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 할 때는 어마어마하게 큰 이유가 있는 거지요. 나쁜 직장을 그만두는 건 작은 이유만으로도 되지만,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건 훨씬 더 큰 이유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누군가 그만둔다고 할 때 굉장히 관성적으로 반응하곤 하는데, 그 사람에게는 좋은 직장이 아니라 죽게 만드는 직장일 수 있어요. ‘바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데 일반론을 들어 개인을 찍어누르는 것. 그거 개인에 대한 심리적인 폭력이에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망가져요.

 

 

[지금 보여지는 모습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Q. 요즘 젊은 세대가 많이 위축돼 있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유가 무엇일까요?

집단적으로 무기력한 것이 너무 당연해요. 수십 개의 자기소개서를 쓰고 매번 거절당하는 경험, 한 개인이 누군가에 의해 반복적으로 거부 당하는 경험은 트라우마가 돼요. 이전 세대는 한국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였던지라 여기저기 지원서를 내면 그중 몇 개는 갈 수 있었어요. 또 눈에 보이는 불공정, 예를 들면 연줄을 이용해, 소위 ‘빽’을 써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들. 그런 부정적 경험들이 지금 젊은 세대에겐 보편적인 거지요. 사회가 병들고 비뚤어져 생긴 이 세대의 집단적 우울이랄까요.

 

Q. 어디까지가 사회 탓이고 어디까지가 개인의 탓일까요?

수많은 회사에서 거부를 당하면 사람이 시야가 되게 좁아져요. 상처를 받으면 사고가 굳어지거든요. 그러니까 추상적, 창의적인 상상을 못하게 되고 굉장히 기능적으로 생각하게 돼요. 쪼잔하고 디테일하고 구체적인 레벨의 사고밖에 못하는 거죠. 문학성을 고민해야 할 작가가 소소한 오탈자에 민감해지는 것처럼요. 불안 때문에 에너지가 잠식되니까, 조금 남은 에너지로는 그냥 기능적인 것만 하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보기에 지금 젊은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사회 탓인 경우가 많다고 봐요. 그런데 정작 젊은이들은 ‘내가 그때 자소서를 이렇게 썼어야 했는데’, ‘면접 때 내가 대답을 제대로 못했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자기를 갉아먹는 거죠. 전 사람들이 그 상황을 강하게 직면했으면 해요. 훌쩍 뛰어나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거죠. 그렇게 어디까지가 자기 문제이고 또 어디까지가 사회의 집단적 문제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해요. 세월호 유가족들이 “내가 아이를 죽였다”라고 하거든요. “내가 아이를 소풍 가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아이가 안 가고 싶어 했는데 내가 보냈다”라고 하죠. 그거랑 똑같은 거예요. 문제가 거대하거나 사회구조적이거나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을 때 피해자들은 헤매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잡아요. 요즘 취업 준비생들이 느끼는 것들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봐요.

 

Q.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직장인으로서, 장녀로서, 엄마로서 여러 역할 놀이를 하는데요. 어떤 순간에도 이 모습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게 중요해요. 예를 들어 아이를 키울 때의 내 모습이 나의 전부가 아니에요. 직장에서 상사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도 이게 나의 전부가 아니고요. ‘나’는 항상 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모습보다 더 커요. 어떤 경우에도 ‘여기서 나타나는 그 모습은 나의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나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해요. 바로 거기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나오니까요.

 

[건강한 ‘경계’가 사람을 살린다]

 

Q. 곧 새 책을 펴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책 제목이 <당신이 옳다: 정혜신의 적정심리학>인데요. 

훈련으로 치자면 실전 무술 같은 책이에요.

사람의 마음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치유를 논하는 것들은 대부분 100년 전 프로이드, 융으로부터 시작한 정신분석학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한데 예를 들어, 우리가 여름휴가지를 고르면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참고하진 않잖아요. 그러면 휴가를 다 망치게 되겠죠. 또 우리가 50년 전 사람이랑만 이야기하려 해도 얼마나 어려워요. 그가 처한 사회적 환경, 거기서 생긴 가치관, 사람과 사회에 대한 개념, 관계에 대한 인식 같은 것들이 너무 많이 다르니까요.

아울러 오늘날의 정신 의학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사람을 규정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고, 많은 것을 뇌의 세라토닌으로 설명해요. 굉장히 기능적이고 의료적이죠. 근데 저는 우리 삶이 그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고통이나 마음, 삶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선 그 이상의 것들이 훨씬 많이 필요해요.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동안 ‘이론에 의지하거나 맞춰서 지금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게 실제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번 책은 이론이나 학설, 연구를 전혀 동원하지 않고 썼어요.

Q. 기존의 정신과 의사나 상담 심리 전문가분들은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 있죠. 한데 ‘그깟 게 뭔 대수냐’는 마음에서 쓴 거예요. 필요하다면 치열하게 논쟁도 해보고 싶어요. 심리학, 정신의학은 사람을 돕고 구하는 학문이에요. 의료라는 게 사람 목숨을 구하고 고통을 덜기 위한 거잖아요. 한데 전문가 자격증이라는 성채 안에서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파괴력 없는 무술처럼 되어버렸어요.

 

– ‘사람을 치유할 수 있을 딱 그만큼의 심리학’이라는 의미로 적정심리학이라는 표현을 쓰신 거군요. 

네, 제가 생각하는 치유는 ‘파괴력’이 핵심인 실전 무술과 비슷해요. 품새가 아름다운 무술과는 다르죠. 이렇게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에 사는 만큼 우리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매번 전문가를 찾아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참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도움이 될 치유의 핵심적인 원리와 힘에 대해 쓰려고 노력했어요.

 

Q. 반복해서 ‘사람을 살리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데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요? 

‘공감’과 ‘경계’요. 관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도 있고 ‘너’도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누군가 갑질하는 상황에서는 ‘나’만 있고 ‘너’가 없는 거니까 이건 관계로서 성립조차 되지 않죠.

사람들이 보통 ‘공감’이라고 하면 참고 들어주는 것, 심지어 별로 동의하지 않고 납득이 안 가더라도 참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감정노동이지 공감이 아니지요. 공감은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어야 하거든요. 견디고 견디느라 결국 스스로가 상처 입는 감정노동과는 달라요.

 

– 그럼 경계는 어떤 의미인가요?

경계에 대한 개념이 살아있다는 것은 ‘나’와 ‘너’가 관계를 맺으며 일어나는 여러 상황에 대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다는 의미예요.

예를 들어 어머니가 자신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해 힘든 상황인데 ‘엄마도 나 때문에 많이 힘들겠지’ 하며 이해하려 애쓰는 식이랄까요. 그 상황에서 어머니는 ‘나’의 경계를 뚫고 침범한, 말하자면 자아의 침략군 같은 존재예요. 나라들 사이에 국경이 있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명확한 자기 정체성의 영역이 있어요. 거기 누군가가 쳐들어왔는데 무방비 상태인 채로 “저 사람은 공격하느라 얼마나 고단하겠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건 경계에 대한 개념이 매우 약한 거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거지요. 어머니 역시 딸의 경계가 명확지 않은 탓에 스스로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돼요. 결국 둘 다 힘들어지는 거죠. 관계에서 공감을 건강하게 가져가려면 경계에 대한 개념이 굉장히 살아있어야 해요. 그래야 나도 지키고 상대도 지켜줄 수 있어요.

 

Q. 매우 깊고 안정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십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방법이 있을까요? 

일단 사람을 많이 만나봐야 하는 것 같아요. 만났다 헤어졌다를 많이 해보는 거지요. 그러면서 자기 욕구, 취향, 추구하는 바,  맺고 싶은 관계에 대해 스스로를 알아가는 거지요.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깨닫는 거거든요.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일반론은 다 소용없어요 내 고유의 무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죠. 그걸 알기 위해 스스로에게 시행착오를 허락하는 거고요. 그래야 비로소 자신에게 맞는 파트너를 찾기가 수월해지겠지요.

 

Q. 부부관계에도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사랑에 빠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을 유지시키는 건 실력이 있어야 해요.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어야 하고, 둘의 사랑이 삶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서로 간에 합의할 수 있어야 하지요. 남편과 나는 서로 굉장히 다른 사람이에요. 다만 우리 사랑을 유지하는 걸 삶의 제1 순위에 놓기로 합의했기에 지금처럼 살 수 있는 거지요. 거기에 쏟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는 우리 삶에서 압도적이에요.

 

Q. 마지막으로 헤이조이스 인스파이러가 되어주시길 부탁드렸을 때 흔쾌히 승낙해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되게 좋은 시도다’,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런 판단과 평가는 저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고요. 저는 그냥 제가 맺고 있는 인연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잘 알고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나리님이 하는 일이 잘 됐으면 싶은 마음, 제가 할 수 있는 걸 돕고 언니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결정한 거죠. 제가 세상을 구하겠어요, 뭘 하겠어요. 저희 부부, 가족, 가까이 알고 지내는 몇 사람들. 그것이 제 삶인 거죠.

 


 

<헤이조이스 프리미엄 컨퍼런스, Con.Joyce>

10월 13일 토요일,
정혜신 님과 함께 ‘불안과 자책에서 벗어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Con.Joyce] 불안과 자책에서 벗어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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